예술을 가까이 두고 살아야 하는 이유


이상의 현실화

Gymnopedie 를 작곡한 에리크 사티가 살던 시대는 지금처럼 카페에서 잔잔한 음악이 흐르던 시대가 아니였습니다. 바그너를 중심으로 한 낭만주의 음악과 오페라가 성행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가구음악 (Musique d’Ameublement) 이라는 이상향을 가지고 <짐노페디>를 작곡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의 그의 음악을 통해 에리크 사티 이상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통해 개인의 이상을 나타내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이상향에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산티아고 루시뇰 <에리크 사티의 초상> (1891)
산티아고 루시뇰 <에리크 사티의 초상> (1891)

에리크 사티 (Erik Satie)는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짐노페디>를 작곡하여 카페에서 연주하면서, 가구음악 이라고 불렀습니다. 좋은 가구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실내의 분위기를 이끕니다.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가구는 집안의 주인이 되어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요. 사람이 가구를 이고 사는 꼴이 되니까요. 사티는 연주회장에 정장을 차려입고 꼿꼿하게 앉아 언제 박수를 쳐야 할지 고민하면서 연주를 듣는 모습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좋은 가구처럼 자기 음악이 일상의 일부로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의 <짐노페디>는 단조로운 반복으로 듣는 이를 번잡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묘하게도 일상의 음악이 탈() 현실을 유도하는 셈이지요. Gymnopédie 는 똑같은 템포로 느리게 반복하는 저음, 선명하게 선율이 흐르는 고음, 이 둘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단순하고 무덤덤하게 진행됩니다. 어떠한 악구의 발전도 없이 소리가 병렬됩니다. 저음부와 고음부의 병렬은 마치 현실과 꿈의 세계처럼 분할되어 흐릅니다. 사티는 파리의 빈민촌에서 어렵게 살아가며 생계를 위해 카페에서 연주하고 있지만, 힘든 현실을 벗어날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꿈이 현실과 만나야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점이 <짐노페디>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합니다. 저음과 고음으로 나뉘어 나란히 진행되던 소리는 마지막에 이르러 완전히 합쳐져서 리듬을 끊고 간결하면서도 단호하게 두번 함께 울리고 끝을 맺습니다. 예술수업 ,꿈과 현실의 이중주

자주(自主)적 인 삶

실질세계 와 여분세계

책은 실질세계와 여분세계를 언급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실질세계는 흔히 ‘먹고 사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기사에서 무어의 법칙보다 더 따른 속도로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살아내기 위해 알아야 할 것도, 적응해야 할 것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생산성, 시간관리등의 키워드도 이러한 배경에서 더욱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실질세계는 사람이 더 나은 효율을 위해 고안해낸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시대에 따라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규칙과 질서가 끊임없이 변합니다.

우리는 실질세계에 많은 시간을 할해하고,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정해진 규칙과 규율을 따라야 하니까요. 하지만 헤겔(George Whilhelm Friedrich Hegel) 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이미 그 안에서 본래부터 자기 고유의 한계와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예로, SNS는 사람들과 시공간에 제약받지 않고 교류를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근거없는 추문을 만들어내고, 소외와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연구결과 처럼요.

반대로, 오락이나 여행 등 여가생활을 즐기는 시간을 ‘여분세계’라고 소개합니다.

우리 삶을 이루는 요소
우리 삶을 이루는 요소

이곳에서 우리는 휴식하고, 다시 실질세계를 살아갈 힘을 충전합니다. 저자는 여분세계, 예술이 자주적인 삶을 위해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술과 ‘아는 것’의 관계

우리는 생각을 통해 세상을 이해합니다. 이 관점에서, 세상이 시작되는 시점은 우리의 사유와 자아에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것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아는만큼 영위할수 있는 범위가 넓어집니다.

여기서 저자는 ‘안다는 것’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데요, 피상적인 정보를 습득하거나, 누군가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은 진정으로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신, 자신의 생각을 통해 해석하고, 재정의 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진정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현실과 직접 부딪쳐 탄생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뛰어난 예술작품들은 인류에게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줍니다. 예술을 통해서 인식하는 능력, 해석하는 능력을 키우고 창의성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창의적이면서 동시에 예술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을 창의적으로 만들죠.

예술을 통해 기른 인식하는 능력과 해석하는 능력을 통해, 내가 처한 현실세계를 한발짝 떨어져 객관적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진정 ‘아는 것’으로 발전시켜 실질세계에 파묻히지 않고, 자주적인 삶을 살수 있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반복의 느린 變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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